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주 전투 (문단 편집) === 전초전 미호천 전투 (7.11 ~ 7.13) === [[http://egloos.zum.com/parizal/v/3197696|참고자료]] [[진천 전투]] 초반부에 성공적으로 지연전을 펼친 뒤 [[제8보병연대|8]], [[제18보병연대|18연대]]에게 뒤를 맡기고 내려온 [[제1기계화보병여단|제1연대]]는 이후 9연대 장병들을 보충받아 재편성[* 1연대는 1대대, 9연대는 2대대, 양 대대를 채우고 남은 인원은 3대대.] 후 진천과 청주 사이의 [[미호천]][* 다만 이곳은 수심과 유속이 낮아 도하가 용이했다.]을 두고 방어선을 형성하고자 [[오근장동|오근장]] 일대에 [[진지공사]]를 한다. 이후 18연대는 정상리 일대에 자리잡아 공동 방어선을 형성했다. 7월 11일 새벽 북한군 탱크 1대와 대대 병력이 미호천 일대에 출몰했다. 이후 적들이 도하를 시도하나 격퇴된다. 7월 12일 오전 10시 적의 탐색조가 강변을 돌아다니며 도하 지점을 물색하고 있었고, 오후 2시엔 화산리에 1개 연대급 병력이 모여들었다. 이에 [[김석원]] 수도사단장은 [[김홍일(군인)|김홍일]] 1군단장에게 요청해 군단 포병이 화신리를 향해 포격, 적들은 8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며 괴멸되었다. 또한 이 와중에 오전 8시 30분부터 오창과 미호천 일대를 공습하던 미군 전투기([[P-51 머스탱]]) 2개 편대(8대)가 9시 40분 경 수도사단 진지를 향해 '''아군 오사를 가해''' 피해가 났다. 오후 1시 40분경 미호천 교량인 팔결교가 폭파되었고, 오후 2시경 미 공군기가 오창 일대에 집결하는 인민군을 공격했다. 그리고 이 와중 오근장과 옥성리간의 586번 도로, 진천 일대에서 트럭 9대를 각각 발견하였다는 보고들이 속속 올라오자 사단장은 각 부대에게 야간공격에 대비한 경계를 강화하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 날 1군단장, 수도사단장, 육본 참모부장(김백일 대령), 2 사단 20연대장(박기령 대령)은 긴급회의를 열어 청주 사수 여부를 논의했다. 하지만 조치원이 피탈되었다는 소식과 [[시가전]]시 청주시내가 초토화 됨은 물론 부하들에게 명령하기가 여의치 않다는 이유 등으로 시가전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오후 9시 적들은 일제히 도하를 시도했고, 이에 1, 18연대 장병들은 지원포격 속에서 이들을 격멸했다. 7월 13일 새벽 적들은 결국 수도사단의 방어선을 뚫고 문의-부강 방향으로 계속 남진했고, 서쪽 미 24사단이 [[전의 전투]]에서도 패배해 금강 이남으로 물러나자 수도사단은 인접 사단들과의 전선정리를 위해 청주 남쪽으로 퇴각한다. 이후 좌측 봉무산의 [[제2보병사단|2사단]], 우측 미원의 [[제1보병사단|1사단]]을 끼고 국사봉 ~ 고은리 ~ 431고지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정오 무렵 청주시내에 진입한 북한군은 이후 야음을 틈타 수색대를 남쪽 방면으로 정찰보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